[역사를 더듬다] 기획-선산 을미의병의 숨겨진 역사(2)-학봉 가문, 선산 을미의병 봉기에 도움을 주다.<한국유통신문.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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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산 을미의병에 관한 사연이 얽혀 있는 선산 낙성루 옆 죽림사터 삼층석탑, 한명수 회장 설명 
 
 
(전국= 한국유통신문) 김도형 기자=  구미시 선산읍성 낙남루 서쪽 방면 한켠에는 죽림사터 삼층석탑이 복원되 광장으로 조성되어있다.
 
삼층석탑 앞에는 '갑오전쟁선산창의비'와 '선산을미의병효수지비'라고 새겨진 비석이 있다.
 
'선산을미의병효수지비'는 을미의병으로 일본군에 붙잡힌 사람들이 지금 죽림사터 삼층석탑이 있는 곳에 예전에 있었던 느티나무에 효수된 것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비다. 지금은 느티나무가 사라져 없지만 지금 이곳은 많은 사람들이 찾을 수 있는 공간으로 꾸며져 옛일을 생각 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을미의병은 한말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이며 갑오동학농민운동에 뒤이어 임진왜란 이래 최초의 본격적인 항일의병이라는 점에서 역사적인 의의가 높다 할 수 있다.
 
명성황후 민비시해사건과 단발령의 강제 시행에 분노한 유생과 백성들은 을미의병을 일으켰고, 경북지역도 예외는 아니었다.
 
최근 선산지역 을미의병 역사에서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이 밝혀졌다.
 
선산갑오동학농민운동기념 사업회 한명수 회장은 1894년 갑오년 선산동학농민운동의 총지휘와 선봉장을 섰던 청주 한씨 가문의 한문출 장군과 한중석 항일투사의 유족이다. 청주 한씨 가문은 37대 한명숙 국무총리, 38대 한덕수 총리, 39대 한승수 총리 등 국무총리를 3회 연속 배출 했고 조선시대 이성계의 첫 부인 신의왕후를 비롯해 총 6명의 왕비가 탄생했다.
 
이러한 청주 한씨는 조선왕가와 사돈을 맺으며 문과급제자 315명, 상신 12명, 대제학 1명, 공신 24명을 배출했고 이 과정에서 한확과 한명회의 역할로 명실공히 조선 최고의 가문이 되었다.
 
한 회장은 선산지역 을미의병 봉기 당시 안동 지역의 명문가문인 학봉 문중의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을 전해왔다. 한 회장에 따르면 선산 생곡리에 위치한 의성김씨 학봉 일족에게 을미의병 당시 안동지역에서 의병을 창의한 학봉 종손이 선산지역 을미의병 봉기를 위한 군자금을 지원했다고 한다. 참고로 학봉종택은 조선중기 문신 학봉 金誠一(1538~1593), 그러니까 文忠公을 입향조로 한 종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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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일투사 한정교(한중석)선생의 묘역에 있는 항일독립운동기념 조각작품 
 
그 내막은 이렇다.
 
한명수 회장은 죽림사에 대해 선산갑오동학동민전쟁을 총지휘했던 한정교·한중석 부자는 해평 쌍림 고택의 일본군 병참기지를 습격 후 비봉산 자락 죽림사로 피신했고 을미의병들이 마지막으로 피신한 장소였다고 한다.
 
한 회장은 선산 지역 을미의병 봉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을미의병이 어떻게 선산에서 봉기 됬냐면 안동의 학봉 종택의 종손께서 안동은 지금 을미의병을 하기가 상당히 어려우니까 선산 생곡리의 먼 일족에게 그 일가를 통해 자금을 보냈습니다. 그 자금을 받은 한문출 장군은 일본의 요시찰 인물이어서 한교리라는 이름으로 개명을 한 뒤 다시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당시 을미의병을 일으킨 한문출 장군과 한중석 항일투사는 일본군들을 야습 했고 을미의병의 본거지로 주목된 죽림사는 일본군들에 의해 모두 태워 버렸고 그 때 당시 삼층석탑도 무너뜨려 버렸다고 한다.
 
이후 1979년도에 선산의 뜻있는 사람과 군수가 힘을 합쳐 선산읍성 옆에 삼층석탑을 복원해 놓았다고 한다. 
 
한명수 회장의 증언에 따라 학봉 문중에서 한문출 장군에게 을미의병 자금이 어떻게 건네졌는지에 대한 사실 관계를 알기 위해 선산 생곡리에 위치한 의성김씨 일가를 찾아가 보았지만 별다른 수확은 거두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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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산 생곡리에 위치한 의성김씨 제실 '저존문' 앞
 
안동학봉 종택 사무처에 있는 학봉 후손인 김재수씨에게 이러한 사실 관계에 대해 문의를 해보았다. 하지만 을미의병 당시의 역사적 기록들이 남아 있지 않아 문중 어른들께 확인해보는 절차를 거쳐야만 했고,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에 대해 학봉 문중 어른들은 상당히 고무되기도 해 사실 근거 파악에 힘쓰겠다는 연락을 받게 되었다.
 
안동 을미의병에 관하여
 
1895년(고종32년) 을미년 8월 20일 민비시해사건인 을미사변이 경북 안동에 전해진 것은 그해 9월 초였다. 또한 안동에  단발령 강제 시행이 전해진 것은 11월 27일 경이었고 이에 격분한 유생과 백성들은 의병을 도모하게 되었다.
 
12월 1일 안동지역에서는 청성서원과 경광서원 그리고 호계서원에서는 통문을 발하여 '5백년 의복문물지향에 하루아침에 단발은 불가'하다고 선언하며 12월 3일 읍저(조선시시대 지방관아가 있던 마을)와 안동향교에서 집회 열 것을 통지했다.
 
읍저에 모이기 전 12월 3일 안동 서후면 검제 위쪽에 위치한 봉정사에 안동 지역 유림 약 50여명 정도가 참석해 밀약을 나눈 뒤, 12월 4일 안동부에서 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의병 창의를 위한 향회를 실시했고 , 12월 6일 안동부 청사 내의 삼우당에 사민 1만여 명이 집결했다고 한다.
 
이 때 모인 사람들 중 상수로는 퇴계 이황의 학통을 이어받은 유치명의 제자인 학봉 종손 김흥락을 비롯해 유지호, 김도화, 유도성, 유지영 등 안동 유림의 대표들이 함께 했다.
 
학봉 종손 김흥락은 1896년 1월 30일 안동의병(대장 김도화) 지휘부 편재 당시 지휘장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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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 을미의병 봉기 당시 서산 김흥락 선생의 간찰(간지에 쓴 편지)
 
안동의병은 영남 북부지역 8읍의 의병들과 연합의진을 편성해, 예천 태봉에 위치한 일본 병참부대를 공격하며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수행했지만 태봉전투에서 패했다. 비록 패했지만 지역민의 항일의식을 고취시키며 이후 독립운동의 기반 조성에 큰 이바지를 했고 관군 뿐만 아니라 일본군과의 전투행위가 있었음을 분명히 알려주는 점에서 안동의병이 갖는 민족사적 의의는 크다고 할 수 있다.
 
다음은 안동의병이 1896년 2월 13일 8읍 의병과의 연합당시 의기를 충전하기 위해 맹세한 맹약문이다.
 
-.역적과 당짓지 말 것
-.중화의 제도를 바꾸지 말 것
-.죽고 사는 것에 마음을 바꾸지 말 것
-.딴 생각을 갖고 사적으로 행동하지 말 것
-.적을 구경하기만 하고 진격하지 않는 행동을 하지 말 것
 
무릇 우리 동맹이 맺어졌으니 이후 서로 언사를 좋게 하며, 한결 같이 약속을 준수하여 춘추의 대의를 밝히고, 인수의 큰 구별을 판단하여 온 누리를 깨끗이 쓸어내고 왕실을 굳건하게 만들어야 한다.
 
만약 이 맹약을 깨뜨리는 자가 있으면 신과 인간이 모두 나서 베어 죽일 것이다.』
 
태봉전투 패배 후 5월 말 군수 홍필주가 각 문중에 서찰을 보내 의병을 파하기를 청했다고 한다. 서찰에는 의병해산령을 지키지 않는 것은 위로는 국가의 죄인이요, 아래로는 조선의 죄인이라며 의진을 파할 것을 요청했고, 이후 안동의병은 고종의 효유문을 받고 관군과 일본군의 쫓김을 당하며 더 이상 항전하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 1896년 6월 초에 안동의병은 각자 흩어져 영양, 춘양, 온천인 오지로 들어가면서 사실상 해산되었다.
 
이는 안동 을미의병의 역사와 관련된 극히 일부의 사실이다.
 
을미의병 후 일본군의 집요한 박해를 피해 몸을 추수려야 했던 안동 지역의 문중들은 을미의병 활동을 했다는 사실만으로 일본군의 모진 핍박을 받아야만 했고 감시의 인물이 되었다. 따라서 을미의병에 대한 사실 관계를 문서로 남길 만한 이유가 하등 없었을 것이란 것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을미의병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증거는 오로지 구전을 통해서만 알려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한명수 회장의 진언이 단서가 되어 역사적 사실 관계를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었다.
 
한 회장은 "안동지역에서 을미의병을 하기가 어려워 선산 생곡리 일족에게 자금을 보넸다."라며 학봉 문중에 얽힌 사연을 얘기했다. 그렇다면 자금을 건내 받은 시기는 1896년 6월 이후 안동의병이 해산할 무렵으로 추정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안동지역에서 못다 이룬 을미의병의 과업을 다른 지역에 힘 실어 주고자 했던 학봉 문중의 의지를 되새겨 볼 수 가 있다.
 
오는 4월 19일 오전 10시 안동시 서후면에 위치한 학봉 종택에서는 일년에 한 번 열리는 '문충공파' 전체의 문중회의가 열리며 150여명 정도가 참석한다고 한다.
 
역사 속에 감쳐졌던 서산 김흥락 선생의 업적이 드러난 시점이라 이번 문중회의는 더욱 고무되어 활기를 띨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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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지방보훈청의 을미의병 후손 초청 만찬, 김한수 의병기념사업총회장
 
 
<한국유통신문 경북지부장 김도형> flower_i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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