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더듬다] 기획-선산동학농민전쟁의 역사(1)-죽장사에 감쳐진 갑오년 선산동학농민전쟁 이야기<한국유통신문.com&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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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봉산 자락에 위치한 선산 죽장사 전경

 
(전국= 한국유통신문) 김도형 기자= 9일 오후 구미시 선산 죽장리에 위치한 죽장사를 찾았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8교구 본사의 말사인 죽장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되었고 이 후의 연혁은 전해지지 않는다. 죽장사는 한 때 폐사된 절이었지만 1954년에 법당을 짓고 절 이름이 법련사라고 불리기도 했으며 지금은 비봉산의 봉황이 깃든 성스러운 장소라는 의미로 서황사라고 알려져 있다. 
 
이곳은 1945년 해방이후 주지스님이 36분이 바뀌기도 했지만 1991년부터 1994년까지 비구니 스님인 명효 스님께서 대웅전과 삼성각, 요사채 등을 지어 오늘의 모습을 갖췄다고 한다. 현재 범일 스님이 주지로 계신다.

죽장사에는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높이 10m의 오층석탑이 있는데 오층석탑으로는 최대규모이며 국보 제130호이다.
 
다음은 혜암 박상국님이 죽장사(竹杖寺)에 관해 쓴 시다.
 
『죽장사 가는길

선산읍에서 무을가는 길
죽장마을 초입에서
죽장사까지는 900m

죽장리 색채 마을을 지나
고즈넉한 산사로 드는 길목
대숲이 있다

퇴계 이황이
대나무을 옮겨 심고
삶의 터전이 된
죽장마을

대숲을 지난 바람이
풍경을 울린다

죽장사
5층 석탑은 높이가 10m
탑의 밑바탕은
기단부분을 18매의
잘 다듬어진 돌을
지면에 쌓고
그 위에
상하 2중의 기단을 마련한 5층 석탑이다

1층
몸돌의 남쪽면에는
불상을 모시는
가로 66cm의 감실이
마련되어
이곳에
불상을 모셨다

죽장사
5층 석탑은 별돌 탑을 모방한
보물 제130호

풍경소리 은은하다

전생에

나는 무슨 죄를 지어
이승에 와서까지
그업
질매지고 사는가,

사랑도 아프고
정도 아프고
바로 누워도 아프고
모로 누워도 아픈
이승 살이

죽장사 앞 뜰에 앉아
대웅전 보노라니
내 마음
배롱나무 꽃 만큼이나
붉다

관세음보살』
 
 
선산읍성에서 무을 방면으로 1.5km 가량 떨어진 생전 처음 가보는 선산 죽장리에 들어서니 도로변에서 비봉산 자락 아래 나즈막히 자리잡은 죽장사가 한눈에 들어왔다. 동네 할머니께 죽장사에 대해 궁금해 물어보았다. 할머니 말씀에 따르면 매일 사람들이 찾고 어떤 때는 버스가 줄을 지어 찾는다고 하며 올라가서 보면 경치가 아주 좋다며 자랑하신다.
 
죽장사는 천년고찰인 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연일 끊이질 않는가 보다.
 
이곳을 찾은 이유는 절을 탐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선산동학농민운동과 관련된 후손 한 분께서 이날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일을 치뤘기 때문이라는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바로 선산동학농민전쟁기념사업회의 한명수 회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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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석에는 학봉 가문의 김차경 찬불가수도 이름 올려져있다.
 
죽장사 한켠에는 1894년(고종31년) 선산갑오동학농민전쟁의 총지휘자셨던 한문출 장군과 항일독립투사 한중석 선생의 역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표석이 세워져 있었다.
 
게다가 표석의 금속판에 새겨진 글귀에는 안동 서후면 학봉가문의 한사람인 김차경 찬불가수의 이름도 새겨져있다. 한문출 장군과 항일투사 한중석 선생이 을미의병 봉기 당시 학봉 가문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라며 그 뜻을 함께 기리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고 한다. 자세한 내막은 뒤에 언급하기로 한다.
 
죽장사 이곳에 표석이 세워진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으로부터 121년 전 갑오년 당시 일어난 선산지역 동학농민운동의 역사에 대해 한명수 회장으로부터 자세한 내막을 알 수가 있었다. 
 
일부 학자들은 한 시대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의 평가에 있어서는 300여년이 지난 후에 그 가치가 공정히  판단될 수 있다고 한다. 그 까닭은 역사와 관련된 기득권 세력의 영향을 받지 않고 가장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 볼 수 있는 시점이기 때문인 이유에서다.
 
역사는 승자들의 기록이라고 했던가, 성공한 쿠데타는 혁명이고 실패한 쿠데타는 반란으로 치부해 오던 것이 우리네 역사이기도 하다. 
 
 
갑오농민전쟁은 일제치하 의병전쟁과 항일무장투쟁을 거쳐 오늘날까지 명맥을 이어져 온 우리의 산 역사다.
 
 
갑오농민전쟁의 역사는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인 대한민국 역사의 근간을 이룰 만치 위대한 역사로 평가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는 시기상조였던듯 후손들의 노력에 의해서만 그 명맥이 이어져 오고 있는 실정이기도 하다.
 
한명수 회장에 따르면 1894년 음력 11월 초에 선산읍성을 점령한 왜군을 격퇴하고자 선산갑오동학농민군 총지휘자였던 한문출 장군은 아들 한중석과 함께 선봉에 서며 격렬하게 전투를 전개했다고 한다. 하지만 일본군의 강력한 신식무기의 화력에 밀려 죽장사에 피신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일제강점기 당시 죽장사는 온갖 탄압을 받았고 절간 문을 닫을 지경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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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척외보국 선봉장 한정교 선생과 갑오농민전쟁 추모비, 이문리 오거리
 
1943년에 항일독립운동가 한중석 선생은 일본경도경찰서 고등계에 연행 수감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해 심신이 피폐해졌고 후에 죽장사에서 은거해 요양생활을 하다가 광복을 맞이했다고 한다.
 
선산갑오동학농민기념사업회 회장이자 후손인 한명수 회장은 죽장사와 깊이 인연된 한문출 장군과 독립투사 한중석 선생의 역사를 기념하고 또한 선산동학농민전쟁의 역사를 알리기 위해 피신지, 은거지 표석을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한명수 회장을 통해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선산갑오동학농민전쟁에 관련된 인물들과 역사적인 사실들에 대해 알게되었다.
 
동학농민전쟁의 발화는 1892년 5월 고부군수로 임명되어 온 조병갑의 학정으로 발단되었다. 조선봉건시대의 말미에 어수선한 정국과 새로운 시대로의 변화에 대한 초들의 갈망이 결집되어 전봉준 장군을 필두로 하여 1894년 1월부터 3월간 고부봉기가 일어났다.  
 
고부봉기 해산 후 3월 20일 전라도 무장에 모인 4천여 명의 농민군은 호남창의소 이름으로 '탐학한 관리를 제거하여 나라의 기틀을 바로잡음으로써 나라의 근본인 백성을 살려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창의문을 선포해 제1차 기병을 해 본격적인 농민전쟁이 시작되었다.
 
4월 27일 전주성 점령 후 5월 3일까지 경군과 농민군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진 끝에 5월 7일 '전주화약' 이르게 되었다. 당시 무력했던 민씨 정권은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했고, 이는 곧 조선 침략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일본군에게 절호의 기회를 제공하게 된 것이다.
 
전주화약은 청일 두 나라가 우리나라에 군사 주둔의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정부와 농민군 지도부간에 용단을 내린 결정이기도 했다. 전주화약후 농민군은 뿔뿔히 흩어졌고 집강소가 설치되 집강소 통치가 호남 지역에서 실시되었다.
 
집강소는 조선 역사상 최초로 농민이 스스로의 힘으로 쟁취한 통치조직으로 이를 통해 민중 스스로를 위한 정치를 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는 크다 할 수 있다. 
 
평소의 삶 속으로 들어갔던 농민군들은 갑오년 7월 1일 일본의 선전포고로 시작된 청일전쟁과 함께 일본의 침략행위에 불안과 분노를 느껴 9월 4일 전북 삼례에서 다시 봉기하기에 이른다. 삼례에 설치된 투쟁본부에서는 전국 각지로 통문을 보내 군사를 불러모았고 사방에서 농민군이 몰려 들었다.
 
이 무렵 선산의 한문출 장군도 삼례취회(參禮聚會)를 다녀와 선산동학농민운동 봉기를 위한 의지를 다졌고, 선산 지역에서는 한문출 장군을 필두로 하여 아들 한정교, 박성빈(박정희 대통령 부친), 정인벽을 내세워 선산 일대의 옥성, 낙동, 상주, 도개, 해평, 산동, 고아, 구미 등지의 동학농민군을 규합한 뒤 일본침략군의 주둔지인 선산읍성을 함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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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일투사 한정교 선생 묘역
 
한편 삼례에서 봉기된 갑오동학농민군 2차 기병은 '서울로 곧장 올라가 권귀와 일본군을 축출한다'는 깃발을 내걸었고, 조선 각지에서 일본군의 경복궁 침입과 청일전쟁 도발애 분개해 농민군이 삽시간에 일어났다.
 
호남 농민군과 호서 농민군이 논산에서 합류해 공주로 진군했고 서울로 진격하기 위해서 공주성 공격의 성공여부에 달릴 만치 사활을 건 싸움이 벌어졌다.
 
농민군은 공주성 공격을 위해 10월 23일 이인 전투를 시작으로 11월 9일 공주성 공격의 주공격로인 우금치에서 불굴의 투지로 장렬히 싸웠으나 1만명이었던 농민군은 500여명만 남을만치 비장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일본군과 관군의 연합세력으로 인한 공주 우금치 전투의 처참한 패배를 두고 좌시할 수 없었던 선산지역의 갑오농민군들은 어둠을 등에 지고 흰 두루미같은 한 떼의 흰옷 입은 차림으로 일본침략군이 주둔해 있는 선산읍성과 일본군 병참기지가 있는 해평 쌍림 고택을 공격하게 되었다.
 
한편 갑오농민전쟁 이듬해인 1895년 을미년,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에 격분한 유생들은 근왕창의를 내걸고 친일내각의 타도와 일본세력의 타파를 목표로 을미의병을 일으켰다.
 
한문출 장군의 아들인 항일투사 한중석 선생은 선산갑오농민전쟁을 총지휘했을 뿐만 아니라 을미의병에도 앞장섰다고 한다.
 
한명수 회장은 선산지역의 을미의병에 대해 주목할만한 사실을 알려주었다.
 
한 회장에 진언에 의하면 선산에서 을미의병이 봉기된 연유는 안동 서후면에 위치한 학봉 종택의 종손께서 선산 생곡에 있는 먼 일족에게 자금을 보내 을미의병을 도모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학봉 가문은 나라가 어려울 때면 의병을 일으켜 호국에 앞장서왔고 독립운동가를 많이 배출한 경북 안동지역의 명문가문이다.
 
기자는 학봉종택에 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관계자에게 전화로 문의해 보았다. 학봉 가문은 역사에 알려지지 않은 의로운 일과 선행을 해온 가문이다. 학봉종택에서는 선산 을미의병과 관련된 사실에 대해 모르고 있는 상황이었고 이 사실을 전해 들은 뒤로 생존해 계시는 연로하신 어른들께 사실 진위 여부를 파악하고자 한다며 답을 줬다.
 
이튿날 김재수씨는 문중의 어른들께 이 사실을 문의해 알아 본 결과, 을미의병 당시 학봉 종손이셨던 서산할배(김흥락)께서 관계되셨을 거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김재수씨에 따르면 을미의병 당시 서산옹께서는 의병을 모우는 일을 총괄하셨다고 하며, 안동 검재를 지나있는 봉정사에서 안동 지역의 유림들과 밀담을 나눈 뒤 삼일만에 만병의 의병을 모았을 정도로 중추적인 역할을 하셨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에 학봉 가문에서 어떤 일을 했다고 하는 구체적인 사료가 남아있지 않아 선산지역의 을미의병을 도운 일과 같은 사실들은 역사 속에 묻혀 왔다. 학봉종택 사무처의 김재수씨는 이번 일이 밝혀짐으로서 학봉 문중 어른들은 고무되어, 사실 근거를 잘 파악해 역사적인 일을 발굴해 내자는 의견이 오갔다는 사실을 전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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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봉 15대 주손 김종길님
 
 
실제로 학봉가문에 얽힌 가슴 뜨거웠던 사연이 EBS방송을 통해 알려지기도 했다. 파락호라고 불리던 학봉 종손 김용환의 일대기에 관한 내용이다. 파락호란 양반집안의 자손으로서 집안의 재산을 몽땅 털어먹는 난봉꾼을 의미한다.
 
그는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하기 위해 한평생 철저히 노름꾼으로 위장을 했고, 현재 시가로 200억원에 달하는 전답 180만평을 만주 독립군의 군자금으로 보냈다. 죽음의 순간까지도 이 사실을 알리지 않으려고 했던 김용환은 임종 직전 이를 안타깝게 여기는 친구에게 "선비로서 마땅히 할 일을 했을 뿐 알리지 말게"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고 한다.
 
죽장사는 선산에서 봉기한 을미의병들이 마지막으로 피신한 장소로서 선산갑오농민전쟁과 인연이 깊다. 을미의병 당시 일본의 요시찰 인물이었던 한문출 장군은 한교리로, 한중석 항일투사는 한정교로 개명을 해 일본군의 눈을 피했다고 한다. 이 당시 정체가 의심스러운 죽장사로 여긴 일본군은 절을 태워버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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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산갑오동학농민전쟁의 역사적 평가가 쓰인 기념판, 일본인들도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한명수 회장은 해방 2년 후에 백범 김구 선생이 죽장사를 방문했던 일화에 대해서도 알려 주었다. 김구 선생과 한문출 장군은 젊은 날 동학농민운동 전 보은집회에서 만났다고 한다. 김구 선생은 죽장사를 찾아 오층석탑의 주위에 풀이 많이 나있는 모습에 가슴아파하며 옛날 동학전쟁을 위해 보은집회에서 만난 한문출 장군과의 인연을 통해 젊은 날 청년 때를 떠올렸고 해방된 조국을 걱정했다고 한다.
 
김구 선생께서 그 사연을 적은 가슴 아픈 글귀가 죽장사에 남아있다.
 
대한민국 근대화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박정희 대통령 가문도 선산동학농민전쟁과 인연이 깊다.
 
선산동학농민전쟁기념사업회에 온 열정을 받쳐 역사적인 사실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한명수 회장은 박정희 대통령의 아버지인 박성빈에 대해서도 알렸다.
 
박성빈은 박근혜 대통령의 할아버지이기도 한 몰락 양반 가문 출신으로 선산동학농민전쟁에 가담해 선산읍성함락에 공을 세웠다.
 
항일운동으로 계승된 동학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을 비적으로 내몰며 비하했던 일제강점기 하에서 박성빈 가문은 동학운동에 참여한 사실을 쉬쉬해야만 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살아 생전에 동학농민전쟁의 최대 격전지였던 공주 우금치에 '동학혁명 위령탑'을 세워, 5·16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정권이 농민전쟁을 계승한다는 뜻을 담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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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대통령이 세운 공주 우금치 동학농민혁명 위령탑
 
 
 
1910년 전까지는 갑오동학농민운동은 '동학난' 혹은 '동비의 난'이라고 불리다가 대한제국 멸망후 농민운동과 농민혁명으로 격상되었다. 동학농민혁명은 갑오년에 일어났기에 갑오농민운동 또는 갑오농민전쟁이라 불리기도 한다.
 
경북 구미 선산지역은 혁명가들이 유난히 많이 배출된 곳이기도 하다.
 
비봉산 자락이 마치 봉황새가 감싸듯 선산고을을 휘감고 있어 인재가 많이 배출되었던가, 선산 지역은 예로부터 인재가 많이 나와 조선조 숙종 때 실학자인 이중환의 '택리지'에 『영남인재의 반은 선산에서 난다』며 기록되어 있고, 실제로 선산읍 노상리와 이문리 일대의 한마을에서 14명의 장원과 부장원 그리고 문과 급제들이 배출되 장원방이라고 불리고 있다.
 
사육신 하위지와 조선시대 성리학자이자 무오사화의 원인이 된 점필재 김종직도 선산이 배출한 인물이다.
 
땅의 기운이 사람의 운명을 결정짓는다고 믿고 있는 동양사상이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군이 이곳 선산 비봉산을 지나다가 인재가 많이 배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산맥을 끊고 불을 피우고 쇠못을 박았을 정도란다.
 
비봉산 아래 위치한 죽장사에는 수많은 역사적인 인물들이 거쳐 갔고, 역사의 흔적이 깃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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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일선산갑농민군낙동강전적순례지
 
선산일대는 항일선산농민전쟁 당시 농민군들의 집결지를 비롯해 점거지 등이 역사적 사실로서 자리 남아 있다. 선산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에서는 이를 기리기 위한 추모비와 기념관 등을 만들어 역사 보존을 해오고 있다.
 
얼마되지 않은 최근의 역사라고 할 수 있는 선산동학농민운동 정신의 계승은 후손들이 반드시 알아야만 될 우리의 안타깝고 슬픈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민족과 나라를 위해 큰 뜻을 품고 한목숨 초개처럼 받친 우리네 선조들의 혼이 여기 선산읍성에 놓여있고, 과거의 일어났던 역사적 사실들이 알려져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길 바래본다.
 
다음은 '선산파랑새야' 노래로서 1894년 11월 선산 갑오농민전쟁 무렵 선산과 김산(김천)농민군들 사이에는 총지휘 한교리, 선봉장 한정교 선생의 무용을 추앙하기 위해 '선산파랑새야 노래'가 유행가처럼 번졌다고 한다.
 
<선산파랑새야 노래>
 
새야새야 파랑새야 영남교리 파랑새야
어서바삐 날아가라 솔잎댓잎 푸르다고
여름인줄 알았더니 함박눈이 펄펄내려
엄동설한 되었구나 새야새야 파랑새야
선산정교 파랑새야 어서바삐 날라가라   
 
 
<한국유통신문 경북지부장 김도형> flower_i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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