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두칼럼 이순락 기자의 "학봉 김성일과 서애 류성룡, 그리고 임진왜란" 강연, 좌배향의 가치 알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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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KTN) 김도형 기자= 20일 오후 2시 구미시 노인종합복지관에서 이순락 경북미디어뉴스 편집국장은 '학봉 김성일과 서애 류성룡, 그리고 임진왜란'이란 주제로 임진왜란 이후 조선시대 선비들로 부터 존경받고 있는 인물들에 대해 주옥같은 강연을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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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의 서두에 조선시대 숙종 임금과 갈처사에 관한 풍수지리에 얽힌 이야기를 흥미롭게 풀어나간 이순락 편집국장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위치한 5개의 능을 합한 능호인 서오릉 중 인현왕후릉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는 사실을 알리며 좌배향의 중요성에 대해 화두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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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순락 국장은 격변하는 21세기에 4차산업혁명이 각광 받듯이 조선시대에는 과학을 비롯해 모든 것을 다룬 최고의 학문이 주역이었음을 얘기하며 주역에서 나온 조선시대 정감록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정감록은 조선시대 선비들 사이에서 절대로 읽지 못하게 한 금서였고 필서로 전파됐다고 알려진 책이다.

 

이씨 왕조시대에 정씨가 왕이 될 거라는 정감록 책 내용을 인용한 이순락 편직국장에 따르면 책내용에는 쇠로 만든 말이 쇠로 만든 마차를 끌고 쇠소리를 내면서 사람들을 수백명을 태우며 달려갔다는 내용이 언급되어 있고 이는 곧 기차의 출현을 예고했다는 것으로 옛 선조들의 미래를 보는 안목에 대해 다시금 되새겨 봐야할 것임을 일깨워 줬다.

 

한편, 이순락 국장은 조선시대 선비들로부터 존경받는 인물인 학봉 김성일 선생과 서애 류성룡 대감을 예로 들며 안동은 조선시대 양반고을로 알려진 곳이라는 말과 더불어 선산 지역은 성리학이 발달돼 유교로 발전되었다는 사실을 얘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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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을 얘기할 때는 의성김씨 학봉 김성일과 풍산 류씨 서애 류성룡 두 양대 가문을 빼놓을 수 없다고 얘기한 이순락 국장은 학봉 선생을 모신 임천서원의 뜰에는 학봉 선생이 일본 통신사를 다녀오며 갖고 돌아와 심은 맥문동이 있다고 소개했고 금오산 초입에 있는 맥문동에 대해서도 아울러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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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락 국장은 안동을 대표하는 두 양대가문의 인물은 퇴계 이황 선생으로부터 동문수학한 친구사이였다고 하며, 서애 류성룡은 임진왜란 당시 상황을 기록한  징비록으로 유명해졌다는 사실을 덧붙였다.

 

한편으로 이순락 국장은 학봉 김성일 선생에 대해서 역사적으로 더욱 알려져야만 하지만 서애 류성룡에 가려진 사실이 있음을 전했고, 학봉 김성일 선생이 의병을 일으키기 위해 격문을 돌리며 진주성 싸움에서 장렬히 전사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조선시대 좌배향의 가치와 의미

 

학봉 선생의 가치에 대해 이순락 국장은 퇴계 이황 선생의 위패를 모셔놓고 왼쪽에 누구를 모실 것인가에 대해 논란이 있었던 사례를 통해 의미있는 해석을 내놓았다.

 

이순락 국장에 따르면 "옛적에는 좌청룡 우백호라는 말이 있듯이 우백호 좌청룡이라고 하지는 않는다"며 좌배향이 갖고 있는 의미와 중요성에 대해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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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긴 학봉 선생은 조선시대 선비들로 부터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조선시대 당시 학봉 선생의 학문적인 업적과 인품 등 다양한 것을 고려해 도산서원에 모셔진 퇴계 선생 위폐의 좌배향으로 하려했으나, 이로 인해 결국 의성김씨와 풍산류씨는 사이가 틀어져 임천서원과 병산서원에 각각 두 인물의 위폐를 모시게 됐다는 사실에 대해 이순락 국장은 역사의 뒷편에 감쳐진 이야기를 전했다.

 

안동에는 양반에도 급수를 따진다?

 

강연에서 이순락 국장은 안동에서 양반의 가치는 벼슬보다는 공부를 많이한 선비가, 그리고 이보다 더 대단하게 평가되는 인물은 나라를 위해 희생한 인물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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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봉 선생이 문신임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 당시 마치 장군처럼 왜적을 물리치는 등 그 활약상이 두드러졌다는 사실을 통해 이순락 국장의 주장은 나라를 위해 헌신한 역사적 인물이 좌배향으로 추대됨에 있어서 마땅한 근거에 대해 소개한 것으로 풀이된다.

 

안동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나라와 민족을 위해 장렬하게 돌아간 학봉 선생에 대해 불천위를 지낸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불천위란 나라에 큰 공훈이 있거나 도덕성과 학문이 높으신 인물에 대해 신주를 땅에 묻지 않고 사당(祠堂)에 영구히 둬 제사를 지내는 것이 허락된 신위(神位)를 말한다.


안동의 경우 가문에 불천위를 모신다는 것은 가문의 영광이므로 불천위제사는 인물의 나라를 위한 공로에 대한 권위를 드러내는 것으로 시제사보다 휠씬 많은 음식을 차려 제사를 지낸다.  경북지역의 대표적인 불천위로는 퇴계 이황 종가, 하회마을 겸암 류운룡 종가와 서애 류성룡 종가, 봉화 닭실마을 충재 권벌 종가, 의성김씨 학봉 김성일 종가의 불천위제사가 많이 알려져 있다.

 

이순락 국장은 유교문화의 본고장이나 다름없는 안동에서는 불천위가 경쟁적으로 있었음과 함께 진정으로 옳은 양반이자 제일 가치있게 평가되는 양반은 나라를 위해 희생한 양반이라고 힘줘 말했다.

 

학봉 김성일 선생은 학문에 있어서도 수백년이 지나도 변치않을 만치 국보급일정도로 가치가 있다고 평가한 이순락 국장은 학봉 김성일 선생이 왜국에 통신사로 다녀와 왜적의 불침론을 보고했고 함께 다녀온 통신사 황윤길 정사는 왜적의 침략설을 보고해 역사적으로 학봉 선생이 잘못 알려진 사실이 있다며 바로 잡혀야 할 부분임을 강조했다.

 

당시 학봉 김성일 선생은 백성들이 불안에 떨 것을 염려해 조정에 신중히 보고한 것을 두고 역사에서는 잘못 다루고 있었던 사실도 있었음을 지적했다.

 

역사적 사실에 따르면 당시 동인과 서인의 정치적 쟁점의 일환으로 서인 일본통신사 황윤길 정사는 1591년 2월 부산에 돌아와 조정에 '반드시 왜군의 침입이 있을 것'이라고 상소를 올려 보고했고 김성일 부사는 민심이 흉흉할 것을 우려해 '그렇지 않다'고 보고했다. 이러한 발언이 나온 것은 일본이 침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과 함께 서인과 동인사이에 치열했던 정치싸움 때문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동인들의 입장은 서인들이 세자건저 사건으로 정치적 수세에 몰려있어 전쟁의 위험성을 과장해 동인의 공격을 막으려는 목적에서 왜군 침략설을 강조했는 것으로 판단했다고 알려져 있다. 임진왜란 발발전 광해군을 세자로 추천했던 서인들은 선조의 미움을 받아 정철, 성혼 등 서인의 영수들이 귀양을 갔으며 이들의 처벌 수위를 놓고 동인측에서는 다시 북인과 남인으로 갈라설 정도로 치열했던 역사적 사실이 실제한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왜군 불침입에 관한 보고로 인해 동인측의 학봉 김성일 선생은 파직되었으나 곧 류성룡의 변호로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김성일 선생은 경상우도 초유사(招諭使)로 임명돼 경상도로 내려가 의병장 곽재우를 도와 의병활동을 하며, 의병을 두루 모으고 관군과 의병간의 협력도 도모케 한 공로가 있다.

 

이순락 국장은 이러한 학봉 선생의 공로에 대해 안동에서는 학봉 선생이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경상도 진영을 두루 다니며 의병 봉기를 촉구하기 위해 격문을 알렸고 진주성에서 장렬히 전사한 사실을 통해 나라를 위해 희생한 인물이어서 크게 평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했다.

 

병산서원의 서애 류성룡에 대한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이순락 국장의 좌배향의 의미와 임진왜란에 얽힌 깊이있는 역사 강연은 마무리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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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유통신문 영남총괄본부장, KTN한국유통신문 인터넷 신문 발행인 김도형> flower_i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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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백과에서 소개하는 김성일 선생

 

본관 의성(義城). 자 사순(士純). 호 학봉(鶴峯). 안동 임하(臨河) 출생. 1556년(명종 11) 도산서원으로 가서 이황(李滉)을 만나 그 문하생이 되었다. 1562년 승려 보우(普雨)의 말에 따라 문정왕후가 희릉(禧陵)을 옮기려 하자, 유생의 신분으로 이에 반대하는 상소문을 지었다. 1564년 진사시, 1567년 대과에 합격하여 승문원 부정자(副正字)에 임명되었다. 이후 정자(正字) ·대교(待敎) ·봉교(奉敎) 등을 역임하고, 1572년(선조 5)에는 상소를 올려 사육신을 복관시키고 종친을 등용할 것 등을 주장하였다.

1573년 전적 ·수찬 등을 시작으로 병조좌랑 ·이조좌랑 등의 요직을 거쳐, 1577년 사은사(謝恩使)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종계변무(宗系辨誣)에 노력하였다. 사행 길에 요동에서 정학서원(正學書院)을 방문하여 중국 선비들과 학문하는 목적을 놓고 토론하였다. 귀국 이듬해인 1579년 홍문관교리를 거쳐 사헌부장령에 임명되어 시사를 과감하게 비판하고 종실의 비리를 탄핵하여 대궐의 호랑이[殿上虎]라는 별명을 얻었다. 1580년 함경도순무어사(咸鏡道巡撫御使)가 되어 영흥 ·함흥 ·삼수 ·길주 ·명천 등의 고을을 순행하면서 민정을 살피고 수령들의 근무태도를 점검하였다. 1583년 특지로 나주목사가 되어 장기간 끌어온 민사상의 송사(訟事)를 해결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당시 김여물(金汝岉)이 순무어사로 나주에 파견되어 민가에서 술을 마시고 밤에 관아로 오자, 그를 꾸짖고 문을 열어주지 않는 강직함을 보였다. 1589년 의정부사인(舍人)으로 있을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보낸 현소(玄蘇) ·평의지(平義智) 등과 일본과의 통호문제를 의논하였고,1590년 일본 사정을 탐지하려고 파견된 통신사행에 부사(副使)로 임명되었다. 일본에 들어간 직후부터 정사 황윤길(黃允吉) 등과 관백(關伯)에게 예를 표하는 절차를 놓고 심한 의견 대립을 보였는데,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의 국왕이 아니므로 왕과 동일한 예를 베풀 수 없다고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1591년 2월 부산에 돌아와 각기 조정에 상소를 올릴 때, 황윤길은 '반드시 왜군의 침입이 있을 것'이라고 보고하였고, 그는 민심이 흉흉할 것을 우려하여 '그렇지 않다'고 하였다. 이러한 발언이 나온 것은 일본이 침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과 함께 서인과 동인사이에 치열했던 정치싸움 때문이었다. 당시 서인들은 세자건저 사건으로 정치적 수세에 몰려있었는데 전쟁의 위험성을 과장하여 동인의 공격을 막으려는 목적이라고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광해군을 세자로 추천했던 서인들은 선조의 미움을 받아 정철, 성혼 등 서인의 영수들이 귀양을 갔으며 이들의 처벌 수위를 놓고 동인은 다시 북인과 남인으로 갈라설 정도로 치열하였다.

이 보고 때문에 임진왜란을 불러온 장본인으로 각인되었고,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파직되었다. 그러나 곧 류성룡의 변호로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경상우도 초유사(招諭使)로 임명되었다. 경상도로 내려가 의병장 곽재우를 도와 의병활동을 하며, 의병을 두루 모으고 관군과 의병간의 협력도 도모케 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그 해 8월 경상도 관찰사로 임명되어 충정을 다할 기회를 맞았다. 의병을 규합하고 군량미를 모으며, 김시민(金時敏)을 도와 진주성을 왜군으로부터 지키도록 하였다. 1593년 순찰사로서 각 고을의 항전 상태를 살피고 독려하기도 하였으나 병으로 곧 세상을 떠났다.

주리설을 따랐고, 예학에도 밝아 '가례'를 준수하였다. 저서로는 《해사록 海槎錄》 《상례고증 喪禮考證》 등이 있다. 안동의 호계서원(虎溪書院), 사빈(泗濱)서원, 영양의 영산(英山)서원, 의성 빙계(氷溪)서원, 하동 영계(永溪)서원, 청송 송학(松鶴)서원, 나주 경현(景賢)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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